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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b.com의 폭주 (Speed Trap)

**카테고리**: [Section 1] 대표 놀이 & 자아 도취 (The Ego Trap)

# 속도라는 이름의 환각

데모데이가 끝나고 무대를 내려오는 창업자의 얼굴을 본 적 있다. 투자자들에게 둘러싸여 악수를 나누다가 누군가 묻는다. “다음 계획은요?” 그가 대답한다. “이제 글로벌로 갑니다.” 박수가 터진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들. 그런데 저 환호 속에 숨어 있는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그 순간에는 아무도 모른다.

팹닷컴이라는 기업이 있었다. 디자인 상품을 파는 이커머스 플랫폼이었는데, 창업 초기 미국에서 터졌다. 고객들이 열광했고, 매출이 치솟았고, 투자금이 물밀 듯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검증된 게 있었다. 특정 고객층이 반복 구매하는 명확한 상품군, 돌아가기 시작한 운영 프로세스, 그리고 수익성의 가능성이 보이는 단단한 지반. 그런데 그들은 이 모든 걸 등 뒤로 던졌다. 유럽으로 달려갔다. 아시아로 뛰어들었다. “세계 정복”이라는 거창한 슬로건 아래.

이런 장면은 생각보다 자주 본다. 나는 이걸 ‘자발적 조난자’라고 부른다. 등산로가 명확히 표시된 산에서, 정상까지 안전하게 오를 수 있는 루트를 두고 굳이 절벽으로 직등하려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다. 남들이 가는 길을 가면 범인이고, 남들이 못 가는 길을 가야 영웅이라 생각한다. 팹닷컴은 미국 시장에서 제품과 시장의 조화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조화를 심화하고 견고히 하는 대신, 새로운 시장이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달렸다. 왜냐하면 검증된 것을 키우는 것보다 검증되지 않은 것에 돈을 쏟아붓는 편이 훨씬 더 ‘혁신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형은 ‘확장 중독자’다. 이들에게 성장이란 수직적 심화가 아니라 수평적 팽창이다. 한 시장에서 깊이를 더하기보다, 열 개의 시장에서 얕게 발을 담그는 것을 선호한다. 팹닷컴은 유럽 각국에 별도 법인을 세웠다. 각국의 물류 인프라를 구축했다. 현지 마케팅 팀을 꾸렸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글로벌 기업’의 외양을 갖췄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각 시장마다 서로 다른 고객 취향, 물류 복잡성, 법적 규제가 기다리고 있었고, 본사는 이 모든 걸 통제할 능력을 없었다. 확장한 게 아니라 산산이 흩어진 것이다.

세 번째는 ‘서사의 노예’다. 사업을 키우는 게 아니라,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키운다. 투자 유치 프레젠테이션에서 화려한 세계 지도를 띄우고, 각 대륙에 꽂힌 깃발을 가리키며 비전을 떠든다. 언론은 이런 걸 좋아한다. “미국을 넘어 유럽으로”, “아시아 시장 공략 본격화” 같은 헤드라인이 쏟아진다. 팹닷컴 경영진은 이 서사에 취했다. 데이터가 아니라 스토리를 믿었다. 숫자가 아니라 헤드라인에 경영 판단을 맡겼다. 결과는 예측 가능했다. 은행 계좌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이 모든 어리석음의 근원은 속도에 대한 환각이다.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은밀한 신앙이 하나 있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믿음. 그런데 이건 반쪽짜리 진리다. 빠르게 움직이되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전제가 빠져 있다. 팹닷컴은 달렸다. 그런데 그들이 달린 곳은 목적지가 아니라 낭떠러지였다. 성장의 속도와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혼동한 것이다. 매출이 오르면 성공이고, 시장이 늘면 안전하다고 착각했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이것이다. 제품과 시장의 적합성이란 발견의 순간이 아니다. 끊임없는 유지와 심화의 과정이다. 한 시장에서 고객이 열광했다면, 그 열광의 이유를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어떤 고객이 왜 반복 구매하는가. 어떤 상품이 진짜 수익을 내는가. 이 메커니즘을 완벽히 이해하고, 최적화하고, 자동화해야 한다. 그 다음에야 확장을 논할 수 있다. 팹닷컴은 이 순서를 뒤집었다. 깊이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넓이를 추구했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바람에 쓰러진다.

그래서 창업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확장할 준비가 됐는가. 아니면 단지 확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도취감에 취한 건 아닌가. 당신의 핵심 시장에서 진정한 지배력을 확보했는가. 그 시장의 고객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운영 효율성을 극대화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시장은 기회가 아니라 무덤이 될 것이다. 팹닷컴이 증명했다. 그들은 너무 빨리 달렸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속도는 방향과 함께할 때만 미덕이다. 방향 없는 질주는 추락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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